くるみ

일본 버블 호황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과 나란히 비교를 해보면 재미있다.

 

예로부터 한국은 일본에 10~15년 뒤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일본은 중국의 폭발적 성장 이전에 항상 세계 경제 2위 자리를 굳건히 해왔다. 그런 와중에도 일본의 국민들은 항상 가난했다. 필자는 2008년 약 1년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 살았었다. 그때의 도쿄를 기억하면 항상 잿빛 도시였다. 밤이 되면 신주쿠와 롯뽄기의 화려한 불빛이 버블경제의 종말을 달래고 있던 시대였다.

 

일본의 국민 그룹으로 등극한 Mr.Children 이 노래한 Kurumi  쿠루미는 일본의 영혼을 노래했었다.

 

쿠루미는 KURU 来る오다. 未来 みらい 미래.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노래다.

 

로큰롤 스타일의 밝은 전주 아래 보컬 사쿠라이 카즈토시의 절절한 목소리가 일본의 우울한 현재를 노래함이 일품이었다.

 

한국인의 기본 정서는 일본을 싫어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압제를 기억하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무나 싫은 것이다. 한국은 2020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 증오와 슬픔을 노래한다. 우리 조상에 대한 예로 그것은 맞는 일이다. 광화문에는 이순신 장군이 여전히 12척의 배를 이끌고 100척 왜구를 섬멸할 준비가 되어있고, 히라가나가 50개의 발음을 옹알거릴 때 세종대왕께서 창시한 한글은 10,000개가 넘는 발음을 모든 국민에게 나누어 주셨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유전인자를 보존하고 있다.

 

한편 일제의 압제로 인해 흑백논리로 점철된 한국 사회가 완전히 건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떠한 말로도 보상 받을 수 없는 일제의 압제에 의한 슬픔과 증오, 비애 그 모든 것이 녹아있는 한국의 문화다. 한편 가해자의 마음은 어떨까? 그들은 그런 짓을 하고도 한때 세계 2위 경제 대국을 건설했으면서도 살만한 세월이었을까? 이러한 이야기는 대한민국에서는 금기다.

 

역사에 관한 설민석의 특강을 듣다보면 오묘한 감정이 든다. 그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수인 일본에 대한 증오 위에 인류 차원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지 정치인들의 무기로 남아있기에 더욱 이야기 하기 힘들다. 때문에 정치인들은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는다.

 

필자가 겪은 일본인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무지한 사람들인지 상상을 초월한다.

 

Mr Children 은 일본의 국민 가수라고 했다. Mr Children 이야 말로 그 무지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해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순진하고 멍청하고 무지한 인간들인 것이라는 부분에 연민을 느낀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21세기의 가장 지배적인 신념은 민족주의라고 한다. 민족주의는 한국과 같은 단일 민족에서는 기독교나 불교 등의 신념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딱히 한국에서만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수긍이 된다. 그는 민족주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스스로의 몸을 바치는 헌신은 영원히 민족에게 기억되고 남아있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개인의 차원에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로써는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민족주의는 다들 좋아하지만 민족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희생은 내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 즉 민족의 영웅, 영도자를 바라는 마음을 말한다. 이승만, 박정희나 박근혜를 다시 찾는 사람들의 기세가 등등한 것을 보면 여전히 유효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취향으로 일본은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언어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매우 닮아있다. 많은 학문과 실생활에서 여전히 일본어에서 전래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2000년이 넘어서 최근에 많이 바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바꾸고 싶다면 일본의 한자를 채용한 수학과 법률 교과서 부터 바꿔라)

 

또한 일본인들의 우리 조선인에 대한 시기심 질투심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어제일자로 타계하신 이건희 회장은 일본인들의 입장에선 일본에서는 없는 경영의 신이었다. 일본 최고의 투자가 손정의 회장은 한국인 핏줄이다. 90년대 워크맨으로 전세계를 호령하던 소니의 왕국을 무너뜨린 것은 삼성전자이다. 삼성이 초일류가 되자 소니는 순식간에 삼류가 인생으로 전락했다. 다만 경영의 신 이건희도 일본 명문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였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같이 느껴진다.

 

일본의 아이돌 문화가 아무리 발달해도 방시혁의 BTS를 너무나 부러워한다. 모닝구 무스메 같은 병맛 아이돌들로 오덕후들을 데리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국 KPOP은 Billboard 를 점령했다.

 

10월 첫주 BTS 의 HOT 100 1위. 4주까지 5위안에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종가는 156000원으로 작전주였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개미들의 슬픔은 폭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말하면 너무나 복잡하기에 하나의 포스팅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하면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기도 내려주기도 둘다 불쌍한 민초의 나라일 뿐이다. 누가 더 불쌍하냐면 국가적으로는 한국이 불쌍하고 민초의 입장으로는 무지한 일본인들에 연민을 느낀다. 그들에겐 한국의 국민이 느끼는 그런 자주적인 가치가 떨어진다. 한국은 신이 선택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인간이 선택한 나라이다.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가치는 한국이 더 높다.

 

Mr Children 이 일본의 국민 가수가 된 배경은 일본인들의 낮은 자존감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로써의 가치는 잃어버린 일본이란 나라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래는 구슬프다. 또한 그 구슬픈 가락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일본은 미국에 항복한 이후 제대로된 주권이 없다. 스스로 주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왕은 그대로 앉아있다. 일본 답지 않다.

 

Kurumi 쿠루미는 이미 박탈당한 미래에 대한 슬픔을 노래하는 원념의 노래이다.

 

흔히 한국의 슬픔을 한이라고 하고 일본의 슬픔을 원이라고 한다. 원념.

 

둘의 차이점은 간단하다. 한은 증오의 대상이 있기에 치유가 가능하고 원은 딱히 대상이 없기에 치유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오로지 하늘의 운명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존재다.

 

일본의 국민가수 Mr Children 의 쿠루미는 결론이 없다. 쿠루 미라이 (오는 미래)에 대한 결정권이 스스로에게 없음을 시인한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일뿐. 운명론에 가깝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국민성이다. 천황에게 맹세하고 미국의 진주만 함대에 카미카제 돌격을 하는 인간성이다. 삶의 결정권이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슬픔과 아픔다움. 최고의 예술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멍청함도 겸비하고 있다.

 

한국인으로써 일본에 유학하며 그런 생각들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너무나 못생기고 못난 인간들, 열등한 인간들을 볼때 어떤 기분이 들까? 필자가 느꼈던 기분이다. 너무 못생기면 감탄이 나고 감동이 된다. 그게 일본인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그게 인생이기에. 여차저차 따지고 보면 우리 개인의 인생도 별 차이가 없지 않는가?

 

윌 스토의 이야기의 탄생에서 말하길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줄 알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인류의 모든 영웅들은 결국 다 죽을 것이다.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은 우주 저 멀리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은하계 푸른 점 하나를 이야기 한다. (창백한 푸른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이 세계의 모든 영웅들이 이 푸른 점의 별안에 있었다. 우주의 광대함에 비하면 너무나 먼지같은 인생이다.

 

일본의 지형을 보면 혼자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한없는 태평양이 있고 육지는 없다. 그것을 극동이라고 한다. 극적으로 동쪽에 떨어진 인간들 far east 라고 한다. 의미하는 바가 간단하지 않겠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환경들과의 교류가 부족해서 뒤떨어진 인간들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한편 신비한 느낌도 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이 세계를 지배한 유럽 세계 입장에서는 부족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뭐 그런데 우리 끼어있는 한반도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문화양식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도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된 극동이긴 하니까.

 

Tomorrow neve know 주로 미래를 알수 없다고 시인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예술은 그렇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소망하기에 일본의 예술은 아름답다. 이걸 어느 민족의 예술과 문화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쨋든 예술은 시대에 상관없이 보존할 가치가 있을 때 오래간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은 우연에 의한 결정이 많다. 단지 하나의 문화권에서 믿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본 유학시절 쿠루미를 정말 좋아했다. 그런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필자의 가난한 일본 생활을 지탱해줬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마음속이 비어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불교와 잡신의 나라이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들에 비해 내세에 대한 기대감도 별로 없는 듯 하다. (환생을 믿는 인도와 비슷한 것 같다)

 

아무것도 없기에 그 순간을 소중하다고 믿는 일본인들은 어떤 면에서 강할 수 밖에 없다. 태평양 전쟁에서 핵탄두를 맞고 패했음에도 경제 대국이 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아름답기도 한데, 미래를 바라보면 그들의 영광은 영원히 20세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 믿는다. 확실한 건 21세기에 그들은 그렇게 강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와 그 다음 세기는 대한민국이 세계의 주인이 될 것을 믿는다. 칼 세이건의 말 처럼 태극기에는 이 세계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태극기는 우주를 포함한다고 한다. 한국인의 초월성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사에서 한국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과 수치들은 결국 이 세계의 주인이 되기위한 과정이었다고 믿는다.

 

필자가 쓴 글중에서는 가장 국뽕스럽고 자랑스럽다.

 

일제의 그 하찮은 20세기 수준의 글들에 비할바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너무나 빛나고 아름답다. 단지 그 빛이 우리 몸에서 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만 못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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